슈베르트 – 변주에서 찾는 변화의 지혜
어느새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전해오는 시원한 새벽 공기가 나를 감싼다. 무더위가 끝나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처럼, 우리는 여러 감정과 경험의 변화 속에서 살아간다.
절대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처럼, 과거의 그림자가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힘겨운 순간도 때로는 온다. 나와 마주한 단아한 40대 여성은 어린 시절,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늘 순환되는 기억의 흐름에 힘겨워한다. 그녀는 가부장적이며 엄격한 아버지의 비난 속에서 자랐다.
‘넌 왜 그렇게 굼뜨니?’ ‘생각이 그것밖엔 안 되냐?’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로부터 오랫동안 받아왔던 질타의 언어들이 세월이 흘러도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어느새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긍정적으로 대해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을 마주할 때면, 그녀의 입에서는 비난의 단어가 때로는 강도 높게 튀어나온다. 그 순간,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오늘 자신의 모습으로 되어버린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게.’ 사과해보지만 단단한 결심은 무심하게도 작심삼일이 되고 만다. ‘엄마는 미안하다 사과하고는 또 그럴 거잖아요.’ 아이들은 점점 엄마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그들 감정에 생긴 골은 더 깊어진다. 커피잔을 들며 생각에 잠긴 그녀, 미간에 생긴 깊은 주름은 힘든 시간을 말해주는 듯하다.
변화하고자 하나 그렇지 못한 안타까움에 매몰된 그녀와 함께 들은 곡은 슈베르트 <즉흥곡 D. 935>이다. 이 곡은 프란츠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827년에 작곡한 피아노 소품 모음으로, 총 4개의 즉흥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중에서도 높은 예술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서정적인 선율에 낭만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즉흥곡 D. 935> 4곡 중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No. 3을 반복해서 듣는다. 이 곡은 주제와 5개의 변주로 구성된다. 여러 변주를 통해 선율이 풍부하게 확장되며, 기술적으로도 매우 도전적인 부분이 많은 이 곡의 주제는 극음악 <로자문데> 3막 간주곡 D. 797을 차용한 것으로 <현악 4중주 13번> D. 804에서도 사용되었다.
제1변주는 조성과 화음 진행이 주제부를 답습하고 선율 변주가 16분음표 박자의 첫 부분과 끝부분을 이용한 경쾌한 점 리듬으로 소프라노에서 노래되고 있다. 제2변주는 제1변주와 공통된 성격이나 선율이 반음계적 진행이나 장식 음형으로 본격적인 변주를 시작한다. 제3변주는 왼손의 셋잇단음표로 되어 있는 화음 위에 옥타브로 겹쳐진 주제가 점 리듬을 중심으로 변주된다. 제4변주는 오른손 16분음표의 반주 아래 저음부로부터 변주 주제가 등장한다. 그러나 도약 진행하는 예리한 점 리듬에 순종하는 듯한 음형은 이미 원 주제에서 멀리 떨어진 인상을 받는다. 제5변주는 제2변주에서 사용되었던 왼손 반주음형을 다시 쓰고 있다. 주제는 섬세한 여섯잇단음표의 음계적 진행 가운데 변주되고 있으나, 그 잇단음표의 마지막에 4분음표와 8분음표의 한숨을 짓는 듯한 음형이 첨가되어 이 곡을 부드럽게 하고 있다. 점점 느려진 변주는 원래의 주제가 회상되고 곡을 마무리한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D. 935> No. 3은 그녀에게 비슷한 반복 속에서도 변화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고 표현할 수 있는 우리의 삶처럼, 하나의 주제가 화성, 조성, 리듬 등의 변화로 서로 다르게 표현되는 것을 듣는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아들에 대한 미안함, 본인에 대한 실망감 등의 여러 감정을 느껴도 괜찮다는 따뜻한 위로를 받은 그녀는 과거의 비난을 스스로 되뇌며 반복하는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다. 주제와 변주의 선율이 내면에서 요동치는 자신의 감정 기복을 다독이는 느낌이 든다며 꺼내기 힘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상처가 그녀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주하며….
마치 음악의 변주처럼, 우리의 삶도 여러 차례의 반복을 거치며 점차 새로워지고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겪은 상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평소 아이들에게 자주 하는 비난의 말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한다.
그 변화로 과거의 그림자는 깨달음이 되고, 새로운 계절처럼 그녀의 삶에도 달라진 모습이 찾아올 것이다. 주제와 변주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의 것을 재해석하고 변모시키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 삶도 끊임없는 재해석과 성장을 통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임을 노래하는 듯하다. 선율이 특히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음악은 어제와 오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감정을 깊이 있게 성찰할 기회를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다.
"과거의 시작은 바꿀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미래는 바꿀 수 있다."
-C. S. Lewis-
최영민 작가
[학력]
경북대 예술대학 음악학과 석사
대구한의대 치유과학과 박사(ABD)
[경력]
전 대구과학대학출강
법무보호복지공단 대구지부 심리위원
아카데미 예송 대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진행
[시상]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수상
[저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에듀래더 글로벌 출판사, 2025)
[대한민국예술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