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민의 마음 클래식

에릭사티 – 반복 속에 담긴 간절함


부모에게는 아이의 탄생만으로도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하는 축복이 된다. 태어난 아이가 옹알이를 시작할 때 그들의 얼굴에는 자연스레 함박웃음이 피어나고, 같은 소리를 수백 번 수천 번 계속해도 미소는 한결같다.

 

‘엄마’라는 단어를 말하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많은 반복과 연습이 있었을까?

 

그의 부모님도 다르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뵌 부모님과 따뜻한 시간을 기대한 그는, 끊임없는 회상으로 반복되는 옛이야기의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께 화낸 일을 떠올린다. 자신의 행동을 바꾸기 쉽지 않아 힘들다고 찾아온 분을 상담으로 만나게 된 오늘.

 

마흔을 갓 넘긴 나이의 그는 쳇바퀴 돌 듯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부모님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좋은 마음으로 다가간 만남이 피로감으로 쌓여버린 날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린다.

 

사랑하는 마음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해 속상한 그와 함께 들어본 곡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의 <벡사시옹(Vexations)>이다.

 

‘짜증’(Vexations)이라 해석할 수 있는 이 곡을 작곡한 에릭 사티는 몇 가지 기행(奇行)으로도 유명하다.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치며 평생 가난 속에 살았던 그는 똑같은 회색 벨벳 정장을 여러 벌 갖춰놓고 하나씩 다 낡을 때까지 입고 다녔으며, 늘 검은색 긴 우산을 들고 다녔으나 정작 비가 오면 우산이 젖을까 봐 코트 안에 집어넣고 걸었다.

 

사티는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을 한다. 6개월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화가 수잔 발라동과의 사랑은 그에게 큰 의미를 남긴다. 그녀와의 이별 직후인 1893년에 이 곡이 쓰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그는 어떤 연애도 하지 않았다.

 

이 곡의 악보는 한 페이지면 충분하다. 그리고 마디를 구분하는 선도 없이 ‘매우 느리게’라는 지시어만이 있다. 단 18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단선율의 주제와 두 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피아노곡으로 악보 머리에 ‘신비로운 페이지’라고 적혀 있고 이런 문구를 덧붙여놓았다.

 

Pour se jouer 840 fois de suite ce motif, il sera bon de se préparer au

préalable, et dans le plus grand silence, par des immoblilités sérieuses.

(이 모티프를 840번 연속으로 연주하기 위해서는, 가장 깊은 침묵 속에서, 진지한

부동성으로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곡의 악보는 한 번도 출판되거나 연주되지 않았고, 훗날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가 발견하여 1963년 뉴욕의 포켓 시어터라는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존 케이지를 비롯해 네 명의 피아니스트가 오후 6시에 시작해 돌아가며 연주하여, 다음날 낮 12시 넘어 공연이 끝났다. 청중들은 처음 30분 동안은 열심히 듣다가, 들어도 들어도 같은 멜로디가 계속 반복되자 객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흐르자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몇 시간이 지나자 객석은 절반 이상이 비었으며, 그나마 견뎌낸 관객조차 졸고 있었다. 연주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객석엔 앤디 워홀을 포함해 열 명의 청중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단일 피아노 작품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곡으로 기네스북에까지 올라간 곡을 편하게 듣고 있던 그와 이 곡을 연주한 케이지의 말을 떠올리며 치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사티에게 단순함은 수단이고, 그는 이를 통해 다른 것을 보여주려 한다. <벡사시옹>의 프레이즈(phrase)들은 반복된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다. 어머니의 반복되는 이야기는 단 하나! 힘들었던 ‘시집살이’ 이야기였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회상을 통해 그때의 부정적인 감정을 조금씩 줄여가고 긍정적인 감정으로 승화시키려는 어머니만의 간절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그는 눈시울을 적신다.

 

어머니는 지난날의 감정을 해소하고 의미를 재발견하는 과정이었던 것을….

기다려주지 못했던 자신을 비로소 돌아보게 된다.

 

‘작은 옹알이에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반응하며 저에게 말을 가르쳐 주신 부모님이신데... 전 그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네요...’

 

한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음악의 반복이지만, 단조로움에서 오히려 자유를 느낄 수 있게 해준 <벡사시옹>. 마음의 응어리가 되어 감정의 보자기에 꽁꽁 싸였던 어머니의 한이 흐르는 이 곡처럼 서서히 흘려보내 지길 바라며 상담을 마무리했다. 자리를 일어서는 아들의 미소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하는 따뜻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음악을 들으며 본질적인 사랑과 연속성을 일깨우고, 정서적 울림으로 깊은 통찰을 함께한 시간에 감사하며...

 

부모님의 반복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른다.

-폴 오스터-

 


 

최영민 작가

 

[학력]

경북대 예술대학 음악학과 석사

대구한의대 치유과학과 박사(ABD)

 

[경력]

전 대구과학대학출강

법무보호복지공단 대구지부 심리위원

아카데미 예송 대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진행

 

[시상]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수상

 

[저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에듀래더 글로벌 출판사, 2025)

 

 

 

[대한민국예술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