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메타나 현악 4중주 1번 – 불안 속에서 찾은 삶의 선율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마주할지에 대한 자유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불안과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살아온 시간에 대한 의미를 한 번쯤 되짚어보게 된다. 오늘 만난 분이 바로 그러했다. 30대 후반,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언제부터인가 회사에서 남들의 작은 행동에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집에서는 아이의 사소한 말투까지 분석하고 살피다 보니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던지, 지난달부터는 이명현상으로 고생하면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다며…. 무엇보다 일상이 무너질 것 같은 예감이 자주 드는 요즘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드네.’라며 어두운 그림자가 하루를 채운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삶의 무게를 초과한 신호임을 알아차린 그는, 자신을 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추천하고 싶은 곡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rich Smetana)의 현악 4중주 1번 E단조 ‘나의 생애로부터’(String Quartet No. 1 in E minor ‘From My Life’)이다.
스메타나는 1824년 보헤미아 왕국 북부 리토미슐에서 태어나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맥주 양조 기사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찍 프라하에 나가 프록시에게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웠다. 19세 때 프라하를 방문한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여 피아노 연주자를 꿈꾸나,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보헤미아에서 확산한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민족운동에서의 작곡가 역할을 자각하게 되었다.
혁명 실패 이후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누구보다 체코 민족운동의 선두에 서서 지휘자, 작곡가, 평론가로 활동하며 오페라 <팔려간 신부> <리부셰> 등으로 음악적인 성공을 거둔다. 과도한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고 서정적인 면이 짙은 그의 작품들로 보헤미안 민족 음악의 시조로 불린 그에게 50세 즈음 건강상 힘든 시기가 찾아오게 된다.
음악계에서 청력상실로 혹독한 고난을 마주한 작곡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토벤 이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다. 바로 스메타나이다. 이 곡은 그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후 그간의 생활을 정리하고, 1874년 프라하에서 야브케니체로 옮겨 작곡에 전념하게 되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작곡되었다. 현악 4중주라는 음악 형식을 빌려 자신의 생애를 노래하고자 표제음악으로 작곡한 이 곡은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오페라 작곡가인 스메타나가 현악 4중주에 삶을 담아낸 것은 베토벤이 후기 현악 4중주를 작곡한 뜻과 통하지 않을까?
1악장 Allegro vivo appassionato, E단조, 4/4박자
'나의 청년 시절의 강렬한 예술 애호, 로맨틱한 분위기,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대한 표현하기 힘든 동경, 그리고 다가올 불행에 대한 예견을 묘사하고 있다.‘
2악장 Allegro moderato alla Polka, F장조, 2/4박자, 3부 형식
'폴카풍의 악장으로, 내 마음에 즐거웠던 청춘의 나날을 되살린다. 그 무렵 나는 댄스 음악장을 작곡하여 도처에서 열렬한 댄스광으로 알려져 있었다.‘
3악장 Largo sostenuto, A flat장조, 6/8박자
'나의 충실한 아내가 된 소녀와의 첫사랑의 달콤하고 행복한 회상을 나에게 다시금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4악장 Vivace, E단조-E장조, 2/4박자-4/4박자
'그것은 1874년에 나의 귀먹음의 시작을 알리는 저 고음역의 숙명적인 이명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약간의 장난기를 내게 된 것은, 그것이 나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변고였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요소를 음악으로 다루는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이제부터는 일이 본궤도에 오르리라는 기쁨에 싸여 있을 때, 귀머거리가 되는 카타스트로피의 엄습으로 좌절되기까지를 그렸다. 그와 동시에 이제부터의 비참한 앞날에 대한 불안과 회복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까지의 나의 장래가 희망적이었다는 지난날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솟구칠 뿐이다.'
음악을 들으며 그의 일상에서처럼 마치 곡을 분석하듯 중간중간 메모까지 하던 그, 어느 순간부터인지 있는 그대로 곡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모습으로 마지막 음의 여운과 대화하듯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뜨고 후~하며, 숨을 내뱉고는 차분히 마음을 이야기한다.
1악장의 긴장이 가득한 음들은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의 마음을 대신해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2악장에선 신나는 리듬을 따라 어린 시절로 여행하며 친구들과 뛰어놀던 순간, 그리고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웃음이 많았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나도 유머가 있고 즐거운 사람이었구나!’ 우울로 덮인 불안의 그림자가 순간 나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며 입가에 미소를 띤다. 3악장은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며 ‘나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따뜻함을 느꼈다고 한다. 4악장의 날카로운 고음이 이상하게도 불편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은 너에게 달려있다.’라는 메시지로 들려온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고통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나의 의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며 조금은 편안하게 자신의 상황을 표현한다.
오늘 그와 인연이 된 스메타나의 곡은 불안에 대해 ‘직면 – 수용 – 지지 – 전환’으로 새로운 자아를 재구성하는 기회를 선물한다. ‘불안을 없애려고만 했지, 마주하고 이야기해보진 않았지...’ 그는 그동안 느껴온 불편한 마음으로 절망하기보다는, 해결할 수 있는 설렘으로 다가오는 오늘을 해석하고 있다.
말없이 흐르는 음악 속에서 불안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천천히 회복하는 그를 보며 음악이 치유해 주는 힘을 또 한 번 느끼게 되는 시간이었다.
삶에 대한 자신의 이유인 ‘왜?’를 가진 자는 거의 모든 방법인 ‘어떻게?’를 견뎌낼 수 있다.
- 니체-
최영민 작가
[학력]
경북대 예술대학 음악학과 석사
대구한의대 치유과학과 박사(ABD)
[경력]
전 대구과학대학출강
법무보호복지공단 대구지부 심리위원
아카데미 예송 대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진행
[시상]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수상
[저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에듀래더 글로벌 출판사, 2025)
[대한민국예술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