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민의 마음 클래식

미도리 고토(Midori Goto)- 음악의 언어로 다독인다.


달력의 마지막 페이지 위에 놓인 하루하루라는 시간은 유난히 소중하게 다가온다. 잘한 일보다 아쉬움이 먼저 떠오르며, 의도하지 않아도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는 12월이다.

 

긍정적인 사고로 좋은 일을 먼저 떠올리고 싶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이유에서일까? 아니면 ‘이 정도면 됐어’라고 만족하는 법이 서툰 탓일까? 반복되는 일상에서 틈틈이 반성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습관을 지니기로 한 새해 약속은 작심삼일로 끝나버리고 한 해를 마무리할 때 즈음이면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끝날 무렵, 미루어둔 숙제를 하기 위해 일기장을 꺼낸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또다시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지천명을 지났음에도 쉽지 않은 것이 인간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올해 마주했던 수많은 공연을 떠올려본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자는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 고토(Midori Goto)이다. 지난달에 공연된 그녀의 리사이틀에서의 깊은 여운은 한 달이나 지난 오늘도 선명하다.

 

그녀가 연주한 첫 곡은 베토벤(L.v.Beethoven) 바이올린 소나타 5번(Violin Sonata no. 5 In F Major Op.24 ‘Spring’)이다. 이 곡은 내가 쓴 첫 칼럼의 선정 곡이었다. 나에게 특별한 곡이어서일까? 그녀의 연주가 특별해서일까?

 

유려한 첫 소절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밀려왔다. 두 개의 음에 의한 하강 음형은 바로크 시대부터 하나의 기법으로 정착되어 ‘희망의 동기’라고 불린다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율은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흘러들어 음악이 다정하게 나를 감싸는 듯했다. 내 삶의 시간을 관통하는 느낌이랄까? 많은 공연과 연주자를 객석에서 보지만 그날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미도리는 197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어머니(세츠 고토)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며 음악을 시작하게 된다. 11살 때 지휘자 주빈 메타의 초청을 받아 뉴욕 필하모닉의 연말 음악회에서 협연하게 되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핀커스 주커만(Pinchas Zukerman)은 ‘그녀의 연주는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나는 기적 같은 순간을 본 셈이었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음악가로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20대(1994년), 그녀는 거식증과 우울증 진단을 받아 치료에 전념하느라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뉴욕대학교 갤러틴 개별연구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임상 심리학자가 되고자 진지하게 고민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통과한 그녀는 다시 무대로 돌아왔지만, 이전과는 다른 미도리 고토(Midori Goto)가 되어 있었다. 단지 완벽하게 연주하는 음악가가 아닌 인도주의와 교육을 위한 활동에 깊이 헌신하는 예술가로 자신의 길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뉴욕에 본부를 둔 ‘Midori & Friends’와 일본을 기반으로 한 ‘뮤직 셰어링(MUSIC SHARING)’ 활동으로 저소득 아동의 음악교육과 장애 아동을 위한 교육, 병원, 요양시설 방문 연주 등 음악의 선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그녀의 활동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일으켜줄 수 있는 큰 힘이 될 거라 믿는다.

 

2부에 연주된 곡 중 다시 듣고 싶은 곡은 로베르트 슈만(R. Schumann, Three Romances for Violin and Piano, Op. 94)과 클라라 슈만(C. Schumann Three Romances for Violin and Piano, Op. 22)의 ‘세 개의 로망스’이다. 두 작곡가의 사랑과 그리움에 대한 표현을 존중하면서도 미도리는 자신의 언어로 감정을 재해석하였다. 부부인 로베르트와 클라라 슈만의 로망스는 같은 형식 안에서 서로 다른 개성을 드러낸다.

 

로베르트 슈만이 요양원에 입원하던 시기인 1849년에 작곡한 곡으로 내향적이면서 달콤하지만 씁쓸한 정조가 깔린 반면, 클라라 슈만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자리 잡은 1853년에 작곡하여 과감하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노래한다. 특히 로베르트 슈만의 작품 중 두 번째 곡인 ‘Einfach, innig’ (단순하게 진심으로)는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사랑과 존중을 전하는 마음으로 함께 듣기를 추천한다.

 

로베르트 슈만의 세 개의 로망스 Op.94는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헌정했다. 그의 시적 세계는 음악에서 단순성을 통해 표출되는데, 그것은 화려하고 기교적인 음악보다 내면적 성찰에 중심을 두고 현실을 초월하는 동경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드레스덴 혁명이 발생한 1848년 이후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에서도 동경과 이상을 추구하는 슈만의 시적 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

 

음악과 인간 경험의 사이를 탐구하고 구축하는 통찰력 있는 예술가이자 활동가, 그리고 교육자라 평하는 미도리의 연주는 기술적인 면을 넘어, 음악 속에 담긴 감정과 서사를 노래하는데 탁월하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바이올린 선율은 청중들에게 내면과 대화하는 시간을 선물한다.

 

‘고생했어. 잘 해왔잖아. 수고 많았어.’ 음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그녀의 연주는 하루하루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격려하는듯하다. 한 해의 끝에서 유연하고 편안하게 변화한 그녀의 삶과 음악적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연주를 떠올리며 오늘을 다시 묻는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도 잘 해왔어’라며 조금은 따뜻한 말을 건네줄 때가 아닐까.

 

아직 남아 있는 12월의 날들, 그 하나하나가 나에게 후회되지 않는 날이 될 수 있도록, 내게 조금은 더 친절하기로 다짐해 본다.


 

최영민 작가

 

[학력]

경북대 예술대학 음악학과 석사

대구한의대 치유과학과 박사(ABD)

 

[경력]

전 대구과학대학출강

법무보호복지공단 대구지부 심리위원

아카데미 예송 대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진행

 

[시상]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수상

 

[저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에듀래더 글로벌 출판사, 2025)

 

 

[대한민국예술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