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는 흘러간 시간을 매듭짓고 다가오는 날들을 맞이하는 시기로 누구에게나 기대와 설렘을 불러온다. 이 새로움을 단지 이전과의 단절이 아니라 그 시간을 품고 다시 살아내는 의지로 본다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 바로 배우 이지민이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하다. 그러나 그 느린 호흡이 가벼운 유순함으로 흐르지만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녀의 말 사이에는 오래 견딘 시간의 밀도, 삶을 쉽게 단정하지 않는 신중함, 그리고 흔들리며 다져진 단단함이 배어있다.

포기한 적 없습니다. 잠시 접어둔 것뿐이에요.
어릴 절부터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또렷했던 그녀는 누군가의 삶을 살아보고 감정을 건네는 일이 자연스러운 꿈이었다. 현실 때문에 안정적인 길을 택해 영어 교사가 되었지만, 배우에 대한 마음은 늘 그녀 안에 남아 있었다.
20대에 연극배우로 7년간 활동했지만, 생계를 위해 연기를 그만두게 된 후 결혼하고 교사, 엄마, 아내, 며느리로 사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 시간은 배우로서의 공백이 아니었다. 그 모든 일상이 삶의 감정과 경험으로 축적되어 결국 지금의 ‘이지민’ 배우로 서 있게 했다.
“제 삶을 통과하며 만들어진 감정들이 무대 위에서 더 진정성 있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바로 그 일상들이 배우로서 노력해 온 가장 긴 시간이자 값진 훈련이었죠”라고 추억한다.
무대는 사랑하지만, 두려움도 함께 왔습니다.
20대에 무대는 관객과 호흡하며 ‘인물로 살아간다’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쾌감이 함께했다. 왜 배우를 꿈꾸었는지 몸으로 확인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40대 가까운 나이로 다시 연극에 돌아왔을 때, 예상하지 못한 무대공포증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지금도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런데도 이 일을 포기할 수 없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그녀. 두려움을 끌어안고 극복하려는 노력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Q. ‘배우 하길 잘했다’라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A. 이 일이 저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직업이라고 느낄 때입니다. 저는 감정의 결이 섬세한 편이라 관계 속에서도 혼자 많은 감정을 느끼고 오래 붙잡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과할까?’ 하며 자책하기도 했죠. 그런데 배우는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들여다보고, 넘쳐나는 반응까지도 부정하지 않고 이해하도록 만들어주었죠. 자신의 감정을 하나의 인물로 정성스럽게 옮겨 입히는 작업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 자신을 비하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저를 아끼며 바라보게 됐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 캐릭터라는 옷을 입혀 세상에 보여주는 일—그 연결을 가장 솔직하게 만들어준 직업이 배우였습니다.
Q. 배우 이지민의 정체성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A.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하나의 역할에 다가가기 위한 훈련과 고민, 그 ‘과정’을 사랑하는 배우입니다. 비로소 배우로 살아갈 수 있는 지금의 삶에 깊이 감사하며, 그 감사함을 잊지 않고 정성스럽게 성장해 나가고 싶습니다.
Q. 현재 활동과 앞으로의 방향을 소개해 주세요.
A. 영화·드라마·연극 배우로 활동을 이어가며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지역 예술가로서 연기와 춤을 매개로 사람들이 자신을 존중하고 표현할 수 있는 예술 활동을 꾸준히 만들고 있어요.동네 문화예술 놀이터 같은 개념으로 연기와 훌라 교육을 진행하고, 학교·복지관·지역 기관과 함께 예술을 나누는 수업과 봉사 활동도 병행합니다. 예술이 특정 계층·장소·시간에 갇히지 않고,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답을 강요하거나 수준을 가르는 예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결을 존중하는 예술—그 안에서 사람의 감정과 몸, 삶의 결을 따뜻하게 느끼고 어루만질 수 있는 예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Q. 최근 가장 큰 기쁨이나 성취감을 느낀 순간을 말씀해 주세요.
A. 매체 배우로서는 출연 작품이 완성된 화면으로 나왔을 때입니다. 준비와 현장의 노력이 영상으로 확인되는 순간에 마음이 놓이고, 다음 작품을 향한 자극도 받습니다.또 다른 기쁨은 지역 예술가로서 제가 기획한 그림이 그대로 실현될 때예요. ‘엄마’라는 이름 뒤에 가려졌던 여성들이 훌라를 통해 몸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자연 속에서 춤추며 ‘한 사람의 여성’으로 존재하는 장면을 마주했을 때 큰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은 제가 왜 이 길을 가는지 조용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Q. 삶을 버티게 한 예술이 있다면?
A. 제게 힘이 되어준 음악은 ‘샤이닝’입니다. 살아내는 데 집중하던 시절, ‘어딘가에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있을까’라는 노랫말을 들을 때마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났고, 그 눈물이 저를 조용히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물속에 있지만 숨쉬기 힘든 물고기 같았고, 그 노래는 저를 그대로 이해해 주는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또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큰 힘을 얻었죠. 젊은 시절의 저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아니라 ‘익스피리언스(experience)’의 시대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경험의 시간이 고통처럼 느껴져도, 그 시간을 통과한 뒤 더 깊은 순수함에 다가갈 수 있다는 그의 시상은, 그 시절의 저를 함부로 부정하지 않게 해주었고 ‘언젠가 의미가 될 수 있다’라는 조용한 희망을 건네주었습니다. 시를 통해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법을 배웠고, 그 경험 자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배우로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도착하는 시간’이다.
이지민의 배우를 말할 때, 흔히 ’무대에 서기 위한 사람’이나 ‘재도전’의 성공담으로만 정리되기 어렵다. 그녀의 핵심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감정과 삶을 속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존재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다. 생계와 역할의 무게 속에서 꿈을 잠시 접어두었으되, 그 시간을 공백으로 규정하지 않고 ‘생활의 훈련’으로 재해석하는 태도. 무대공포증과 기다림을 통과하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라는 고백. 그리고 예술을 ‘특별함’의 상징이 아니라 ‘일상 가까운 존엄의 언어’로 되돌려 놓으려는 실천은, 이 배우의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인간의 심리나 취향이 아니라, 존재가 열리는 방식으로 사유한다. 그녀가 사랑하는 배우라는 직업 또한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보단 삶 속에서 묻혀버릴 뻔한 자신의 존재를 역할로 다시 여는 진실한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녀는 느린 걸음으로도 끝내 자신의 감정과 삶을 배반하지 않는 방식으로 ‘배우’라는 이름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도달은, 무대 위 한 장면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정성스럽게 살아낸 시간 전체로 완성된다.
오늘도 묵묵히, 예술 향기 가득한 행복한 일상과 무대를 오가는 그녀의 따뜻한 행보를 전하는 시간에 감사하며...

[대한민국예술신문 최영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