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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익의 무아(無我)적 수행 - 흑연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시간의 틈’

세종대에서 남미·유럽 거쳐 세계로, 한국적 ‘상감(象嵌)’과 ‘흑연’의 만남 - 2026 베네치아 비엔날레 헌정전 및 상하이 춘미술관 개인전 앞두고 주목

 

현대 미술의 흐름이 화려한 기교와 디지털 매체로 옮겨가는 시대, 역설적으로 가장 원초적인 재료인 ‘흑연’과 ‘흙’을 통해 시간의 본질을 묻는 작가가 있다. 세종대학교 미술대학을 기반으로 북미와 남미, 유럽을 종횡무진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혀온 권순익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 탄광의 기억, 흑연의 생명력으로 피어나다

권순익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의 고향, 경북 문경의 탄광촌에 있다. 어린 시절 목도했던 어둠 속의 은은한 광택은 작가에게 지워지지 않는 미학적 원형이 되었다. 그는 연필심의 재료인 흑연을 통해 목탄보다 정돈되고, 먹보다 깊이 있게 빛을 머금은 독특한 마티에르(Matière)를 창조한다.

 

 

그의 작업 방식은 철저히 ‘수행’의 과정을 따른다. 캔버스 위에 밑칠을 한 뒤 아크릴 물감과 흙을 섞어 켜켜이 쌓아 올린다. 층층이 쌓인 마티에르가 오랜 시간을 견디며 완전히 마르고 나면, 비로소 흑연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수만 번 문지르고 또 문지르는 반복적 행위는 도예 장인에게 전수받은 ‘상감기법(Inlay Technique)’의 현대적 변용이자, 작가 자신을 비워내는 무아(無我)의 과정이다.

 

 

◇ 추상으로 나아간 본질, ‘희생’을 통해 만나는 ‘미래’

작품 초기에 한국 전통 문양과 민화의 구상적 형태에 집중했던 그는 점차 형식 너머의 본질을 탐구하며 자연스럽게 추상의 세계로 침잠했다. 권순익이 말하는 추상은 단순히 형태의 생략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상처나 찰나의 행복에 머물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기쁨을 기꺼이 인내하는 ‘희생’의 미학이다.

 

 

특히 기와 작업에서는 문경 폐광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발길에서 남긴 검은 광택과 거친 기와의 질감에서 출발해서, 새로운 설치 작품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했다. 평면의 흑연이 입체적인 한옥 기와 모습으로 설치된 것은 2018년부터이다. 연필의 흑연이 대중을 순간적으로 마음을 끌어 당기는 작품으로 된다는 것이 이 작가에게 몰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작품에 흥미롭게 집중할 수 있다.

 

오롯이 작품에 집중하는 그의 삶에 흑연이 전통적인 색을 넘나들며 순수하게 예술을 대하는 자세가 느껴진다. 혼자 생각에 오래 잠긴다는 작가의 평소 모습은 수수하고 담백하지만, 작품을 대하는 모습은 내적 카리스마가 보인다. 그것은 깊은 심연의 색과 은은하게 빛나는 흑연과 닮아 있다.

 

 

◇ 2026년, 베네치아와 상하이가 비춘 ‘K-추상’의 저력

권순익의 예술 여정은 이제 전 세계의 시선이 모이는 국제적 무대로 이어진다. 올해 4월 열리는 제61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 중 헌정 국제전에 참여하며 유럽 미술계에 다시 한번 강렬한 인상을 남길 예정이다. 또한 7월에는 중국 현대미술의 중심지 중 하나인 상하이 춘미술관(Chun Art Museum)에서의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2025~2026년 주요 전시 일정

권순익 작가는 현재 국내외를 오가며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 대만 카오슝: 《The Bards of Time and Space (시공의 시인들)》

    • 기간: 2025년 11월 23일 ~ 2026년 11월 1일

    • 장소: 에일리언 아트 센터 (ALIEN Art Centre)

    • 내용: 중국 기하학적 추상의 선구자 호칸(Ho Kan) 작가와의 2인전이다. 1955년부터 2024년까지의 작품 72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연례 기획전으로, 권순익 작가의 '흐름(Flow)'과 '기(Qi)'를 담은 추상 회화 및 설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 홍콩: 《Unfolding Silence (침묵의 확장)》

    • 기간: 2025년 12월 10일 ~ 2026년 1월 31일

    • 장소: 주홍콩한국문화원 전시실

    • 내용: 한국 현대 추상미술 작가 6인(권순익, 배상순, 우종택, 정윤경, 김덕한, 이채)이 참여하는 그룹전이다. 흑연으로 틈을 메우는 독창적인 기법을 통해 '치유와 기억의 서사'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대한민국예술신문 최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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