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연주는 기술을 넘어 삶의 서사를 담는다. 바이올리니스트 임현재의 음악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의 연주는 단순한 음의 재현이 아니라 무너짐과 회복, 그리고 다시 살아내는 인간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네 살 때 피아노로 음악에 입문했고,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에서 처음 잡은 바이올린은 곧 그의 삶을 이끄는 언어가 되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성장기를 보낸 그는 일찍이 남다른 음악적 감수성을 드러냈다.
일곱 살, 노스캐롤라이나에서의 한 무대. 바이올리니스트 제임스 에네스의 베토벤 협주곡 연주 전 프리 콘서트에서 ‘바흐 파르티타 3번’을 연주한 어린 임현재의 선율은 깊은 울림을 남겼다. 에네스는 같은 곡을 앙코르로 연주하며 화답했다. 음악이 언어를 넘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일찍부터 ‘연주자의 길’을 확신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 음악은 쟁취해야 할 목표라기보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삶의 일부였다. 전환점은 고등학교 3학년, 처음 출전한 ‘싱가포르 국제콩쿠르’였다. 수상이라는 결과도 좋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확신이었다."이 길이 나의 길이구나."그때 비로소 그는 연주자의 삶을 선택했다.

2020년 5월, 커티스 음대 졸업을 앞두고 있던 이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와 중환자실에서의 사투, 그리고 이어진 1년 7개월의 병원 생활. 바이올린을 잡기는커녕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 시간 동안, 임현재는 악기를 내려놓아야 했다.
◇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 절망을 견뎌낸 역설의 시간
사고 후 임현재는 지독한 공백기를 보냈다. 병실에서 다시 잡은 바이올린으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켰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 ‘하기 싫다’고 나에게 말했어요.”

음악과 무관한 유튜브 활동, 무인 문구점 운영 등 방황의 시간도 있었지만, 운명은 결국 다시 그를 바이올린 앞으로 불러세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다시 악기를 잡게 된 그에게 연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닌 ‘행복’으로 다가왔다. 2024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재기의 첫걸음이었다. 단 4개월의 준비 기간,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던 그 무대에서 그는 두려움을 헤쳐 나갈 용기를 얻었다.
‘그 한 걸음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예요.’
이후 그의 행보는 눈부시다. 2025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우승, 2026 엘마 올리베이라 콩쿠르 우승, 그리고 영국 클래식FM 선정 ‘30세 이하 라이징 스타 30인’에 이름을 올리며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증명하고 있다.
스승 미도리와의 인연, 그리고 휠체어 위에서 발견한 ‘음악의 본질’
그의 곁에는 든든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특히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Midori)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여섯 살 무렵 미도리의 윤이상 곡 연주를 들으며 난해하게 느꼈던 꼬마 관객은, 오랜 시간이 흘러 그의 제자가 되었다.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다시 활을 잡겠다는 제자에게 스승은 “inspiring”라는 최고의 찬사를 건넸다. 미도리는 임현재에게 단순한 스승을 넘어, 음악과 삶을 함께 지탱해 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음악, 그리고 삶의 태도
그의 음악은 단지 연주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기쁨도, 슬픔도 영원하지 않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는 이 문장을 통해 자신을 다스린다. 이는 시간 속에서 존재를 이해하는 철학적 태도다. 기쁨도 고통도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과정임을 인식하고, 그 흐름을 견뎌내는 인간의 내적 균형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시간 속에서 존재를 이해하는 태도, 기쁨과 고통을 고정된 상태가 아닌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그 속에서 연주는 매번 새롭게 태어난다. 같은 악보라도 매번 다른 연주가 가능한 이유, 그는 이 ‘가능성의 무한함’을 음악의 최고 매력으로 꼽는다.
신체적 제약은 오히려 그의 음악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휠체어에 앉아 연주하며 활이 무릎에 닿고 하체의 중심을 잡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임현재는 이를 ‘음악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인다.
“예전에는 틀리지 않는 ‘완벽함’에 집착했다면, 지금은 음악 그 자체의 본질과 감정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전문가와 비전공자의 경계를 허물고, 단 한 사람에게라도 진심 어린 울림을 전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결국 임현재의 음악은 단순한 ‘회복’의 서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가 예술의 본질로 향해가는 치열한 과정에 가깝다.
고난을 통과하며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은 그는 고정된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음악인의 길을 걷고 있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선율을 길어 올린 임현재.
그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는 이제 고통을 넘어, 삶을 향한 숭고한 찬가로 우리 곁에 울려 퍼지고 있다.
[대한민국예술신문 최영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