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이지 – 침묵은 또 다른 시작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환절기가 있고, 악장과 악장 사이에는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숨 고르기가 있다. 우리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사유 또한 기다림이 필요하지 않을까? 확고한 의지로 본인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고자 최선을 다했다는 60대 가장, 충분히 예전처럼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단지 그의 생각일 뿐, 회사의 입장은 확연히 달랐다. 퇴직 후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설레임은 생각일 뿐, 현실로 다가온 달라진 일상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졌고,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무기력함과 공허가 자리했다. 아직 대학생인 아이의 뒷바라지며 노모의 생활비 등 걱정할 것이 많다는 그와 함께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내가 건넨 곡은 현대 음악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이다. 무대에 등장한 연주자는 피아노를 앞에 두고 4분 33초 동안 어떤 건반도 두드리지 않고 퇴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악보에는 '침묵'을 뜻하는 음악 용어 'TACET(연주하지 말고 쉬어라)'이 적혀 있다. 악장도 나뉘어 있어 1악장부터
브루흐 – 가을, 비올라 그리고 그녀 서늘한 바람에 책장을 넘기며 흔들리는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은 계절이 다가온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서점을 향하고, 내면을 향한 진지한 대화를 준비할 책 한 권을 고른다. 바람이 반주해주고 마음이 속삭이는 대로 흥얼거리며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한눈에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활짝 웃을 때 미소 짓는 표정에서 그녀임을 확신했다. 우리는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서로 다음 일정이 있었던 이유로 연락처를 주고받아야만 했다. 아쉬움 가득한 순간을 품고 돌아서는 발걸음에 아련함이 잦아든다. 공부를 특별히 잘하거나 다른 재능이 있어 돋보였던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를 존재감이 있었던 그녀. 조금 더 친하게 지내고 함께 모둠도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그녀를 떠올리며... 잠깐 스쳤던 순간이 나의 하루를 설레게 했던 그 날의 음악을 들어 본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말투, 그리고 그 속에 흐르는 단단함이 느껴지는 그녀와 닮은 곡은 바로 막스 브루흐(Max Bruch, 1838-1920)의 <Romance for Viola
에릭사티 – 반복 속에 담긴 간절함 부모에게는 아이의 탄생만으로도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하는 축복이 된다. 태어난 아이가 옹알이를 시작할 때 그들의 얼굴에는 자연스레 함박웃음이 피어나고, 같은 소리를 수백 번 수천 번 계속해도 미소는 한결같다. ‘엄마’라는 단어를 말하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많은 반복과 연습이 있었을까? 그의 부모님도 다르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뵌 부모님과 따뜻한 시간을 기대한 그는, 끊임없는 회상으로 반복되는 옛이야기의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께 화낸 일을 떠올린다. 자신의 행동을 바꾸기 쉽지 않아 힘들다고 찾아온 분을 상담으로 만나게 된 오늘. 마흔을 갓 넘긴 나이의 그는 쳇바퀴 돌 듯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부모님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좋은 마음으로 다가간 만남이 피로감으로 쌓여버린 날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린다. 사랑하는 마음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해 속상한 그와 함께 들어본 곡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의 <벡사시옹(Vexations)>이다. ‘짜증’(Vexations)이라 해석할 수 있는 이 곡을 작곡한 에릭 사티는 몇 가지 기행(奇行)으로도 유명하다.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치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우리는 묘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햇볕은 여전히 여름을 기억하게 하지만, 바람결엔 가을의 향기가 전해지는 듯하다.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좋은 시간. 소위 ‘가을을 탄다’, ‘계절을 탄다’라는 말로 우리의 멜랑콜리(Melancholy -우울 또는 비관주의에 해당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를 설명하려 한다. 요즘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한가요? ‘탄다’는 ‘어떤 감정이나 상태를 타고 흐른다’ 또는 ‘정서에 영향을 받는다’라는 뜻으로 확장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도 계절처럼 변한다. 오늘의 공허가 내일의 설렘으로 이어지고, 어제의 상처가 불현듯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러한 내적 파동 속에서 늘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 흔들림을 가만히 받아들일 때 음악은 언어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되어 다가오나 보다. 얼마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다리를 다친 60대 건장한 청년 같은 중년을 만난 오늘, 그와 함께 삶의 의미를 묻고 답해보는 시간을 가진다. 평소 건강에 대해서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그였지만, 생각지 못한 골절로 몇 주간 깁스하면서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유(思惟) 안에서 느낀 몇 가지의 감정, 그리고 잘한 것보다 잘못한 것
스메타나 현악 4중주 1번 – 불안 속에서 찾은 삶의 선율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마주할지에 대한 자유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불안과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살아온 시간에 대한 의미를 한 번쯤 되짚어보게 된다. 오늘 만난 분이 바로 그러했다. 30대 후반,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언제부터인가 회사에서 남들의 작은 행동에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집에서는 아이의 사소한 말투까지 분석하고 살피다 보니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던지, 지난달부터는 이명현상으로 고생하면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다며…. 무엇보다 일상이 무너질 것 같은 예감이 자주 드는 요즘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드네.’라며 어두운 그림자가 하루를 채운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삶의 무게를 초과한 신호임을 알아차린 그는, 자신을 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추천하고 싶은 곡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rich Smetana)의 현악 4중주 1번 E단조 ‘나의 생애로부터’(String Quartet No. 1 in E minor ‘From My Life’)이다. 스메타나는 1824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멈추지 말고 끝까지 나아가라 ‘당신의 삶을 위해, 당신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나요?’ 누군가가 던진 질문에 찬찬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귀한 선물을 받은 듯한 느낌으로 며칠이란 시간을 집중하며 보낸다.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왔고 여전히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요즘 들어 정체기에 머문 듯이 하는 일마다 더디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기분에 힘들다는 내담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철학적 사유를 좋아하는 분이라 덕분에 나 또한 깊은 사고의 숲으로 향하게 된다. 그를 위해 준비한 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Op. 30이다. 이 곡은 슈트라우스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 소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영감을 받아 1896년 작곡한 곡이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도입부에 사용되어 우리에게도 가깝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864년 태어난 독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당시 유명한 뮌헨 궁정악단의 호른 주자인 아버지와 양조업자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 덕분에 일찍 음악을 접
아르보 패르트 – 음과 음 사이의 공간에서 배운 진정한 사랑의 의미 넉넉지 않은 형편이라 번듯한 학원 하나 제대로 못 보냈던 아들, 그런 자식이 누구나 부러워하는 옆집 아들에서 번듯한 가장으로 잘 성장해주었다. 학부모로 학교를 방문하던 날이면, ‘○○의 엄마’라는 애칭은 그녀에게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장신구였다. 엄마라는 이름은 자식을 낳는 순간부터 사랑으로 그들을 보살핀다. 마치 자신의 몸과 마음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엄마라는 존재 역시 사람인지라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겪게 되는 감정의 고리들을 풀지 못하여 때로는 힘든 구간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시쳇말로 사춘기와 갱년기의 대립이라 하듯이 말이다. 오늘은 엄마로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깊은 시름에 빠진 분과 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어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전부였던 그녀의 아들, 그런 아들이 성장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왔고, 결혼했다. 속으로는 ‘서운해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들을 빼앗긴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하다고 한다. 아들이 늘 말하던 ‘우리 엄마가 최고야’에서 ‘우리 엄마가 최고의 시어머니야’라는 말로 이어
브람스 – 다정한 선율의 큰 위로 전국 대부분의 지방에 폭염주의보가 발표된 한낮, 가을을 맞이하기 전 지루한 더위로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눈웃음이 어여쁜 40대 여성이 약속한 시각에 정확히 맞춰 들어온다. 더위에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는지…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전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탁자에 놓인 아이스 커피의 위안도 잠시뿐, 움직일 때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는 그녀. 높은 체감온도는 그녀의 스트레스 지수를 대변해주는 듯하다. 깊은숨을 쉬기조차 힘든 그녀의 일상은 몸과 마음이 함께 쉴 틈 없이 달린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다급히 전화 받는 그녀,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의 간병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통화하는 그녀의 태도로 보면 위급상황인 듯 보였으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머니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 오라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사소한 집안일 같지만, 혹시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은 늘 시계추 위에 있다. 평소 느끼는 그녀의 불안이 그대로 전해지는 순간,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의 학원 픽업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고 동시에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의 면회 가능 시간
베토벤 – 함머클라비어와 그녀의 모놀로그 뜨거운 햇살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눈이 부신 오후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세월의 고운 결이 느껴지는 그녀와 마주한다. 세련된 말투, 입꼬리를 올리며 아름다운 미소로 인사를 건넨 그녀는 커피 한 모금과 함께 깊은숨을 삼킨다. 자신의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며, 라벤더 향기가 풍기는 손수건을 꺼내더니 잠시 눈물을 훔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릴 적,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그녀는 대학 진학을 뒤로하고 취직하여 여동생, 남동생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다행히 성실한 동생들이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가지고 자리 잡은 후, 그동안 미루어 온 자신의 공부를 계속하며 여러 직업을 거쳐 결혼한 남동생의 아들까지 유학 뒷바라지를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그녀는 고마움을 알아주는 동생들 덕분에 자신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음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던 중 사춘기에 접어든 조카와 마찰이 생겼다. 학원을 경영한 경험이 있던 그녀는 조카의 교육에도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조카는 그런 고모가 부담스러웠는지…. 점점 멀리하는듯한 느낌은 급기야 피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잘 견디며 살아온 스스로에 대해 충만함이 가득했
슈베르트 – 변주에서 찾는 변화의 지혜 어느새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전해오는 시원한 새벽 공기가 나를 감싼다. 무더위가 끝나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처럼, 우리는 여러 감정과 경험의 변화 속에서 살아간다. 절대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처럼, 과거의 그림자가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힘겨운 순간도 때로는 온다. 나와 마주한 단아한 40대 여성은 어린 시절,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늘 순환되는 기억의 흐름에 힘겨워한다. 그녀는 가부장적이며 엄격한 아버지의 비난 속에서 자랐다. ‘넌 왜 그렇게 굼뜨니?’ ‘생각이 그것밖엔 안 되냐?’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로부터 오랫동안 받아왔던 질타의 언어들이 세월이 흘러도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어느새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긍정적으로 대해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을 마주할 때면, 그녀의 입에서는 비난의 단어가 때로는 강도 높게 튀어나온다. 그 순간,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오늘 자신의 모습으로 되어버린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게.’ 사과해보지만 단단한 결심은 무심하게도 작심삼일이 되고 만다. ‘엄마는 미안하다 사과